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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선으로부터(정세랑)

바오밥 하단 2020. 6. 30. 22:28

'기세 좋은 여자들'의 결혼 생활이 궁금해서 새벽에 결제 버튼을 눌렀다. 괜찮은 사람이 추천해서, 표지가 예뻐서, 테두리의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와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내가 처음에 예상한 것과는 다르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던 책. 일상적인 소재에 담는 생각이 좋았고 공감도 하면서 술술 읽었다. 몇몇 인상 깊은 장면만 남겨놓고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다시 찬찬히 읽어볼 예정.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초장부터 내가 생각한 책이랑은 다르구나하고 깨달았다.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것. 중요하지.


"남편이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반쯤, 어쩌면 완전히 공감하지만 책에서나마 '그럼에도'라는 것을 보고 싶었다. 현실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로맨스 범벅의 소설 말고, 현실 속에서도 주체적이고 당찬, '이겨내는 사랑'을 하는 여성이 궁금하다. 요즘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돼서 그런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삶일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어떤 형태의 감정인지 궁금하다.

내가 지켜본 결혼은 무언가 하나씩 포기한 것 같아서 본받기엔 조금... 끔찍해보인다. 그럼에도 무언가 대단한 사랑을 하고 싶기도 하고, 막상 현실은 그냥 소소한 재미만 보며 사는게 좋기도 하고. 내 마음엔 마땅히 내어줄 곳도 없는데 평생 살 사람을 생각한다는게 웃기기도 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뒷 내용이 섹스이야기라서 받아들인게 다르긴 하지만 그냥 공감이 가서 남겨놓고 싶다. 이걸 깨달았던 때가 꽤 어렸을 때인데 언제였더라. 그 후로 마음을 부분부분 채워주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질투도 느끼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 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

이 문장만으로 화수가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나는 아직 '거리감'이 힘든데 언젠가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삶의 대상이. 그 요구를 이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는 법을 찾지 못해 자꾸만 덜 아문 곳을 덧나게 했다. ... 보채고 싶지 않으면서도 보채고 말았다. ... 헛된 약속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 사랑했는데, 이제는 헛된 약속이라도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
모든 것은 변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변화의 폭까지 감당하려고 했는데 감당 가능한 폭이 아니었다. 난기류인 줄 알았건만 추락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