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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양철과 강철의 숲(미야시타 나츠) - 조율과 잔잔한 생각들

바오밥 하단 2020. 4. 29. 01:11

2020년 3월 13일의 글




  폭신한 양과 단단한 강철과 숲이라니. 제목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피아노 소리에 끌려 피아노 조율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 주인공이 조율을 하며 겪는 일들을 잔잔하게 풀어썼다. 큰 사건으로 구성된다기보다는 주인공의 생각에 더 집중하게 되고 나와 엮어보는, 그래서 제멋대로의 해석이 가능해서 즐거웠다. 잔잔하고 밝은 느낌. 내가 요즘 찾고 있는 분위기라서 좋았고,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적인 면이 <피아노의 숲>같은 에니메이션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소소하게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1. 피아노 조율, 관심

  피아노에 따라서, 그 피아노의 주인에 따라서 조율을 한다. 더 둔하게 만들어서 틀린 음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하고, 맑은 소리에 집중해서 실력자를 위해 조율하기도 한다. '대충 고객이 좋아할만한 음만 내게 하면 좋아해'라고 해도 하나하나 공들이는 노력을 저버리지 않는 것. 그 사람을 생하고 그에 맞는 음을 내려고 하는 것. 성장하는 카즈네를 믿고 작은 변화들을 맞춰가는 것. 그 세심한 관심이 좋다.



2. 잘하고 싶다는 것

  피아노의 기준 음인 '라'는 모차르트 시대 유럽에서는 422헤르츠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는 435헤르츠로 기준이 바꼈고 지금은 440헤르츠, 또는 442헤르츠에 맞추기도 한다. 사람들이 밝고 맑은 소리를 원해서 '라'의 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손에 강한 힘을 주고 두드려야 밝은 소리가 나는데 그냥 기준음을 높여버려서라고 한다. 사람들의 잘하고자 하는 욕심이 담긴 기준음인 것이다. 나같은 사람만 모인 세계라면 이미 500헤르츠는 뚫어버렸을텐데.


  줄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 손가락에 더 강한 힘을 주고 두드려야한다는 것.



3. 재능, 헛된 노력

 선배들은 주인공 도무라에서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헛되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도무라는 '헛됨' 자체를 몰라서 유쾌했던 장면이 있다. 더디고 실수가 많은 도무라지만 스스로 그 과정을 헛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이,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도 없이 조율사의 길을 걷는 것에 아무 의심도 없이 일을 배우는 게 유쾌했다.(유쾌함 외에 적절한 표현이 없다) 웃기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나를 비웃게 되기도 하고.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할 때, 시작이 익숙해지는 지점이 무엇보다 힘들다. 처음의 호기와 의욕이 사라지고 익숙하지만 부족한 실력만 보일 때가 가장 어렵다. 자괴감에 빠져 내 길이 아닌 걸까,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걸까, 재능이 없는 걸까,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하지만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걸 알기에 자과감의 늪에서 버티기 싸움을 한다.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놓지만 않겠다는 생각으로. 길게만 느껴지는 싸움이 끝나면 0에 수렴하던 그래프는 어느새 수직으로 훌쩍 올라가 있다.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고 난 그걸 즐길 수 있다. 또 다시 위를 바라보고 이 싸움을 반복하며 한 번만 더, 한 칸만 더 위로 올라간다. 


  구구단 하나 못외워서 방과후 나머지 학습에 매일 남았던 꼴찌 5명 중 하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알파벳 하나 못외웠던, 중학교 전교1등으로 올라갔다가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97명 중 90등인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았던, 당당히 수능으로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왔지만 복수전공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나. 나의 노력은 이랬는데 요즘 끈기가 점점 없어진다. 결과를 먼저 속단하고 현재의 노력을 헛되다고 생각하는 걸까.



4. 소박한 목표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 '콘서트홀 피아노를 조율하는 사람이 되기'가 아니라 아직 고등학생인 카즈네의 피아노를 조율하기가 목표인 주인공 도무라. 소박한 것 같지만 나는 이 목표가 조율사로서의 길을 잘 붙들어주는 원동력인 것 같다고 느꼈다. 카즈네의 쌍둥이 유니가 같은 꿈을 말했을 때 응원을 잠시 주저한 것도 너무 귀여운 장면이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걸어가게 만드는 목표가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타인을 딛고 일어나는 경쟁이 중심인 목표가, 그런 목표를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회가 참 별로다. 나의 진로를 다시 생각하는 중인데 '사회를 이롭게 하자'같은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고 싶다.



5. 몰입, 미쳐버리기

  정말 단순히 소리가 좋아서, 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평생할 일을 결정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노력은 노력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내가 쏟은 노력에 초점을 맞출 때, 어중간한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관심도에 초점울 맞추는 것도 위험하다. 모든 일을 일관된 관심을 가질 수 없기에 관심으로 경중을 판단하면 시작도 못할 일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입이 중요하다.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고 미쳐버리는 것. 그 외에 잡생각은 사라져서 오히려 평화로운 그런 상태. 주인공 도무라처럼, 그런 일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