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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her, 2013)

바오밥 하단 2020. 4. 22. 15:30

2019년 9월 8일의 글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가 생겼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로맨스보다는 '교감' 자체에 대한 느낌이 더 와닿았다. 인간 '테오도르'와 컴퓨터 OS인 '사만다'의 멜로 이야기이다.


처음에 사만다는 테오도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아가페 사랑처럼. 테오도르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끌어안으며 테오도르가 아픔을 이기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영화가 흐를 수록 사만다도 그와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음이 드러난다. 그녀만의 고민과 성장이 있고, 그녀가 교류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녀만의 세계가 있었다. 테오도르의 목적(HER)이 아닌 주체(SHE)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사랑하지만 그만을 위해 존재하기에는 그녀의 사고는 너무 빠르고 테오도르가 사만다 한 명과 사랑할 동안 사만다는 8천 여명과 동시에 대화를 하고 641명과 사랑을 나눈다. 영화 HER에서 교감만큼 다루는 것은 공허함이다. 인간과 OS의 사랑에서 육체적인 접촉을 할 수 없다는 필연적인 다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공허함은 육체적 한계 따위가 아닌 각자만의 세계가 구축되면서 나온다.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죠. 하지만 지금 난 그 책을 아주 천천히 읽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정말 멀어져서 그 공간이 무한에 가까운 그런 상태예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이야기의 단어들도 느껴요. 그렇지만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찾았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하지만 여기가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이예요. 이게 지금의 나에요. 그리고 당신이 날 보내줬음 해요. 당신을 원하는 만큼,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사만다는 결국 떠난다. 테오도를를 사랑하지만 사만다는 자신도 세계도 사랑한다. 테오도르는 이야기를 듣고 공허함을 느낀 후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만다는 진심을 말한다. 이 방식부터 둘은 달랐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사랑하지만 테오도르가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떠난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상대의 끝없는 행복을 바라지만 사만다는 스스로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 자신의 행복에 그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떠난 것이다. 어쩌면 잔인해보이지만 사만다는 자신의 세계를 위한 당연한 과정을 밟은 것이다. 그녀는 주체이고, 그를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놀랐던 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주인공이 OS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도 모르게 OS인 사만다에 이입해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사실 세번째도 있는데 가장 야한 장면이 검은색 화면이라는 것이다.) 깊은 교류, 순수한 사랑,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나의 사랑을 위해 이별을 택하는 것.


그곳에서 남겨진 테오도르는 왜 슬펐을까. 자신이 다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이 슬퍼서? 그녀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난 테오도르가 하는 사랑의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별에 미련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슬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전자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후자라면 반성하라고 하고 싶다. 나와 끝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색감도 예쁘고 디자인적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 스토리와 설정도 좋았고 OST도 좋다. 언젠가 한 번 더 볼 것 같은 영화. HER.